- 부서진 땅에서도 왕성하게 자라난 희망에 관하여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류시화(65)의 詩 ‘들풀’이다. 이 詩는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면서 맺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공원이나 강변을 걸으면 어디를 가도 ‘들풀’을 만난다. ‘들풀’은 산이나 들에서 자라는 풀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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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걷다가 흔히 볼수 있는 들풀) | ||
이러한 ‘들풀’을 주제로 영국의 시인 빅토리아 베넷(Victoria Bennet)이 쓴 책 <들풀의 구원/All My Wild Mothers>(김영남 옮김)을 접했다.
빅토리아 베넷은 10년 세월, 언니의 죽음과 아들의 지병 등 자신이 겪어온 삶의 조각들을 치유의 힘을 함유하고 있는 90개의 들풀과 연결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꿈은 허상이 되어’의 데이지, ‘언니의 장례식’의 로즈메리, ‘역경에 맞설 힘’을 주는 서양민들레, ‘외로움을 물리치는’ 붉은 장구채, ‘희망을 안겨주는’ 보리지…들풀마다 우리가 모르는 지식들이 새록새록 담겨 있다.
세상사는 믿음이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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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풀의 구원'의 표지) | ||
책은 제1장, ‘이것은 내가 꿈꾸던 정원이 아니다’에서 시작해서 제8장. ‘들풀의 구원’으로 마감한다. 제1장을 펼쳐본다.
<나는 정원사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정원사의 모습에는 맞지 않는다. 나는 제때에 심지 않고, 심어야 할 곳에 심지 않는다. 무엇을 심어야 하고 무엇을 심지 말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호기심과 우연에 이끌려서 되는 대로 가꿀 뿐이지만, 내게는 여기 교란되고 망가진 땅에서도 새 생명이 자랄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뭔가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가난한 작가의 절규가 가슴을 친다. 동서양 구분 없이 작가나 예술가는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실로부터 건진 한 줌의 에너지마저도 끊임없는 빚의 압박에 소진된다. 세상은 우리에게 구제책으로 ‘긴축 생활을 하라’고 권하지만, 그것은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에게서 안전망을 거둬버리는, 냉혹하고 잔인한 말이다. 정치인들이 국가의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떠드는 동안 남편은 어떻게 해야 좋은 아버지가 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우리를 먹여 살리지 못할까 봐 겁낸다. ‘진짜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말한다. 나는 그에게 예술가도 진짜 직업이라고, 우리가 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늘 그랬듯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는 우리 일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고, 우리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쇠뜨기'는 경제문제 해결과 자아 감각 강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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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말이 '되찾은 행복'인 쇠뜨기) | ||
제4장, ‘생명은 내내 굳세게 들이 닥친다’에서 ‘쇠뜨기’에 대한 글이 특히 와 닿는다. 작가가 설명하는 쇠뜨기에 대한 내용이다.
<옛사람들은 금을 연마하는데 쇠뜨기를 흔히 썼다. 규소, 인, 망가니즈. 마그네슘이 풍부하다...차는 주름을 줄이고 염좌와 염증을 달래고, 상처를 청소하고, 지혈하고, 잇몸 출혈을 낫게 하는 외용제로도 쓸 수 있다. 어린 식물은 먹을 수 있다. 익혀서 아스파라거스 대응으로 쓰고...습한 풀밭, 정원, 황무지에서 잘 자란다.>
이정도면 시인이 아니라 식물학자나 한방병원 원장쯤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쇠뜨기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자아 감각을 강화하는 데 유용한 들풀이란다.
작가는 쇠뜨기 부분에서 ‘내 몸에 귀 기울일 때’라는 소(小)타이틀을 붙였다.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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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빅토리아 베넷) | ||
작가와 주부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모습이 절절하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늘 작가와 엄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둘을 다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몸을 차지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이 몸이 한 번이라도 내 것이기는 했을까?>
직업인·가정주부를 막론하고 일을 하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싶다. 작가의 반성문이다.
<엄마가 되는 법과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다보면 가끔 양쪽으로부터 잡아당겨지는 기분이 들 테고, 그 틈새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런 날 나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깊게 숨을 마시고, 내뱉습니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 생(生)은 탄생의 첫 숨과 죽음의 마지막 숨 사이에 있다’라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숨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순간, 이토록 아름답고 끔찍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순간,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다.”
<들풀의 구원>은 가난과 질병, 상실과 모성 사이에서 한 줌의 잡초 씨앗을 심으며 끈질기게 희망을 키워나간 여성 작가의 ‘삶의 철학’을 숨김 없이 표출한 책이다.
필자는 ‘내년 봄에는 어디에라도 씨앗을 심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가을바람에 실어 보냈다.
장상인 발행인 renews@re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