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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인권변호사와 함께한 사람 사는 이야기

기사승인 2023.10.25  16: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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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본분을 잃지 말아야

얼마 전 일본 도쿄에서 변호사와 신문사 사장을 만났다. 필자의 일행 두 명과 함께한 식당에서다.

변호사의 이름은 츠지 메구무(惠, 75), 신문사 사장의 이름은 미쓰나가 이사무(光永勇, 71)였다.

자리에 앉아 맥주로 가볍게 건배를 하고서 정식으로 인사했다.

필자가 변호사의 명함을 보면서 말했다.

“저는 ‘일본판 쉰들러’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 어떻게 아세요?”

하더니 후배인 신문사 사장에게 물었다.

“자네는 아는가?”

“ 잘 모릅니다.”

“아? 장 선생! 존경합니다.”

“별 말씀을 요.”

이때부터 이야기가 급속도로 발전했다. 서로 사진을 찍으면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그가 아는 한국인도 있었다.

   
(츠지 변호사/ 중의원 두 번을 지낸 그는 올해 또 출마한다.)

휴대폰 들고서  필자가 썼던 월간조선(2019. 12. 4) 기사를 내보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했다.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춘원 이광수(李光洙)는 같은 대학에 다니던 최팔용(崔八鏞)을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해서 선언서를 발표하는 거사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유학생 60여 명이 체포됐고, 최팔용·백관수 등 8명이 기소됐다. 이 조선 유학생들을 변호한 사람이 바로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 변호사였다. 그는 최팔용과 백관수, 송계백을 변호하면서 이들에게 적용된 내란죄 혐의에 대해 무죄(無罪)를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헌(官憲)의 착취와 학대, 차별 문제 등을 규탄·항의하는 등 항상 조선인들의 편에 섰다. 그는 ‘차별을 받아 살 곳이 정해지지 않는다’는 일상생활의 문제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 시대의 ‘인권변호사’였던 셈이다.

후세(布施) 변호사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많은 조선인이 수시로 그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 조선인을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를 ‘일본의 쉰들러’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러한 공적으로 우리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을 수여했다. 일본인으로서 건국훈장을 받은 것은 그가 최초이다. 그가 눈을 감은 지 50년이 흐른 2004년의 일이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일본천황에 대한 폭탄투척 모의 혐의로 법정에 선 박열(朴烈, 1902-1974)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3)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두 사람의 옥중결혼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는 가네코가 옥사(獄死)하자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서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보내는 일에도 앞장섰다.

2023년 5월의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선생 선정

   
(문경에 있는 박열의 묘와 가네코의 사진)

올 봄에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본인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대한민국을 사랑한 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여, 2018년 애국장)·후세 다쓰지(남, 2004년 애족장) 선생을 〈202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일본 요코하마 출생(1903년)인 가네코 후미코는 흑도회(黑濤會, 일본에서 한국인들이 조직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운동 단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의열 활동을 한 박열(1989년 대통령장)의 배우자다. 박열과 함께 흑도회 기관지인 ‘흑도(黑濤)’를 창간하고서 노동자 후원과 친일파를 응징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쳤다.

1923년 9월 1일 도쿄 일대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선생은 일제의 요주의(要注意) 인물인 박열과 함께 보호검속(保護檢束, 공공의 안전을 해롭게 하거나 죄를 지을 염려가 있는 사람을 경찰에 잠시 가둠)이란 명목으로 연행 및 수감됐다.

조사과정에서 박열의 폭탄구입 계획이 드러나자, 검찰은 두 사람에게 ‘대역사건(大逆事件, 천황 또는 국가의 전복을 기도하며 벌이는 대규모 반역사건)’ 혐의를 씌워 폭발물 취체(取締)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재판과정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정부에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투쟁을 벌였다. 1926년 2월 26일 도쿄 대심원 법정 공판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이름은 ‘박문자’라고 했다. 의연한 태도로 박열과 함께 사형 선고를 요구했으며 사형 판결 즉시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일본 검찰은 10일 만에 두 사람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사면을 재판부에 신청했고, 곧 사면장을 발행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 정부의 기만 술책에 저항하며 사면장을 형무소 앞에서 찢어버렸다.>

***

필자는 일본 미야키현에 있는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고향 마을을 다녀온 적이 있다. 마을 입구의 공원에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었다.

   
(후세 변호사의 고향 마을에 있는 송덕비)

 비에는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 변호사는 그래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변호사의 본분이니까.

 

장상인 발행인 renews@renews.co.kr

<저작권자 © 한국부동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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